무과실책임의 기본 개념
무과실 책임이란 가해자의 고의나 과실이 없어도 법률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합니다. 평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는 일부러 그랬다거나(고의) 실수로 그랬다(과실)는 것을 증명해야 배상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과실책임에서는 이런 증명 없이도 피해를 입힌 사람이 배상책임을 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이 일부러 잘못한 건지 실수였는지를 증명하지 않아도 피해자가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과 그 손해가 해당 물건의 결함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배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주요 선진국(유럽, 미국, 일본, 한국 등)을 비롯해 다수 국가이고, 분야에 따라 범위와 기준이 조금씩 달라요. 특히 산업재해, 환경, 교통, 원자력, 의료 등 공공성과 위험성이 큰 영역에서 널리 채택되어 있습니다.
법에는 어떻게 명시되어 있을까 (법률 조문)
환경오염 또는 환경훼손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해당 환경오염 또는 환경훼손의 원인자가 그 피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 환경정책기본법 제44조
토양오염으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한 경우 그 오염을 발생시킨 자는 그 피해를 배상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등의 조치를 하여야 한다. - 토양환경보전법 제10조의3
원자로의 운전등으로 인하여 원자력손해가 생겼을 때에는 해당 원자력사업자가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 - 원자력 손해배상법 제3조
제조업자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에게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 제조물책임법 제3조
전통적인 과실책임주의에서 벗어난 이유
전통적으로 법은 "잘못한 사람이 책임진다"는 과실책임주의를 따랐습니다. 즉,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밝혀내야 책임을 물을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릅니다. 기술이 너무 복잡해지고, 물건이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들어지고 팔리다 보니, 사고가 나더라도 정확히 누가 잘못한 것인지 찾기가 어렵죠. 그래서 법은 방향을 조금 바꿨습니다.
“잘못을 찾는 데만 시간 끌지 말고, 피해자가 먼저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누구 잘못인지 따지기 전에 결함 있는 물건으로 피해가 생기면 만든 쪽이 먼저 책임지는 방식이죠.
무과실책임이 등장한 배경과 의의
1. 현대 사회, 편리함 뒤에 숨은 위험
산업혁명 이후, 세상은 훨씬 편해졌습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다양한 화학제품
원자력 발전소의 전기
자동차,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
첨단 의료기기와 신약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을 풍요롭게 하지만, 동시에 예측하기 어려운 피해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2. 잘못을 입증하는 건 너무 어렵다
예를 들어, "공장이 조심하지 않아서 환경이 오염되었다" 를 증명하는 것은 일반 시민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려면 복잡한 기술적 지식이 필요하고, 막대한 조사 비용이 들어가며, 기업 내부 자료에 접근해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인과관계를 증명해내야 하죠. 법에서도 이런 현실적 어려움을 인정하고 있는 거죠.
3. 이익에는 책임이 따른다
무과실책임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사회적 형평성입니다.
"위험한 활동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그 위험으로 인한 피해도 책임져야 한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화학공장은 제품을 만들어 수익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지역에 환경오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장이 아무리 조심했어도, 그 활동으로 이익을 얻는 이상 피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무과실책임의 기본 사상입니다.
무과실책임의 이론적 근거 (feat. 교과서)
1. 위험책임설
"위험한 것을 다루는 사람이 그로 인한 손해를 책임져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 화학공장, 폭발물 등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을 다루는 사람은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도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때 그 위험을 관리하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위험 통제권에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원자력 발전소나 화학공장의 안전 관리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것을 운영하는 사업자만이 통제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있죠. 따라서 그 통제권을 가진 사람이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항공기 사고의 경우 승객들은 비행기의 안전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이 없습니다. (비행 중 문을 열어버린, 그런 사람들 빼구요) 항공사, 승무원들이 안전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항공사가 무과실 책임을 지는 것이 타당하죠.
2. 보상책임설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손해를 주었다면, 그 이익으로 배상하는 것이 공평하다"
사업 활동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그 수익의 일부로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이론은 이익과 손실의 공평한 분배 원칙에 기반합니다. 어떤 활동으로 이익을 얻는다면 그 활동으로 인한 손실도 함께 부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난감 제조 회사는 대량 생산을 통해 수익을 얻죠. 대량 생산 과정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일정 비율의 불량품이 나올 수밖에 없고요. 불량품임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는 성인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아무 편견 없이 입으로 가져가 사고가 났다면? 이때 그 불량품으로 인한 피해는 제품 판매로 얻은 수익에서 보상하는 것이 공정합니다.
3. 위험원인책임론
"위험을 만든 사람이 그 위험으로 인한 손해를 책임져야 한다"
이 이론은 원인 제공자 책임 원칙에 근거합니다. 평범한 일상(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위험을 만들어낸 사람이 그 위험의 궁극적 책임자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 식품.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식품을 만들어냈다면, 그로 인한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대해서는 그걸 개발하고 판매한 업체가 책임을 쳐야 한다는 거죠.
4. 공평론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공평한 해결책"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피해를 당했을 때, 그 개인이 모든 손해를 떠안는 것보다는 위험을 만든 기업이나 단체가 책임지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더 공평하다는 관점입니다. 개인은 사회가 만들어낸 위험으로부터 혜택을 받지만, 동시에 그 위험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피해가 특정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사회 전체가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 더 공정합니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무과실책임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합니다. 이는 개별 기업이 모든 위험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사회 전체가 위험을 분산해서 부담하는 것이죠.
무과실책임이 적용된 실제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가습기에 사용하는 살균제에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등의 유해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사용한 소비자들이 폐질환 등 심각한 건강 피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나올 정도로 피해 규모가 큰 사건이에요.
이 사건은 제조물책임법 제3조에 따른 무과실책임이 적용된 대표적 사례입니다. 법원은 “피고들이 제조·판매한 이 사건 가습기살균제에는 설계상 및 표시상의 결함이 존재하고, 그로 인하여 원고가 신체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피고들은 제조물 책임법 제3조, 제5조에 따라 이 사건 가습기살균제의 결함으로 손해를 입은 원고에 대하여 그 손해를 연대하여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습니다. (수원지방법원 2019.9.18.선고2016나51085판결)
라돈 침대 사건
라돈 침대 사건은 침대 매트리스에 모나자이트라는 천연방사능 물질이 함유되어 있어 라돈이 방출되는 침대를 사용한 소비자들이 건강상 위협을 받은 사건입니다. 2018년 5월 원자력안전위원회가 특정 침대 매트리스에서 라돈이 검출되었다고 발표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죠.
이 사건은 침대 매트리스에 모나자이트를 사용한 것이 제조물책임법상 결함에 해당하는지, 즉 무과실책임이 적용되는가가 중요 쟁점이었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지난 7월 3일, 아래 이유로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침대 매트리스는 사람이 장시간 밀착하여 사용하는 제품으로, 방사성 물질이 사용자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피고는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피고가 침대 매트리스에 방상성 물질인 모나자이트를 도포함으로써 얻는 이익은 거의 없거나 불분명한 반면, 방사선 피폭의 해로움은 분명하다.
라돈은 세계보건기구(WHO) 등이 폐암발병의 주요 원인으로 규정한 물질로, 폐세포가 방사선에 노출될 경우 유전자가 손상되거나 안정성이 변하면서 악성종양(암)이 발생할 수 있다.
무과실책임이 가져온 변화
1. 기업의 안전 의식 향상
무과실책임이 도입되면서 기업들은 더욱 신중해졌습니다. "실수가 아니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으니, 애초에 사고가 나지 않도록 더 철저한 안전 관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2. 피해자 권리 보호 강화
과거에는 "증명하지 못해서" 포기해야 했던 많은 피해자들이 이제는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사회적 비용의 합리적 분배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피해를 기업이나 사회가 나누어 부담하게 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더 안정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무과실책임의 한계: 완전무결하지 않은 제도
면책 사유가 존재합니다
무과실책임이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재지변: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전쟁: 전쟁이나 내란 등 불가항력적 상황
피해자의 고의: 피해자가 일부러 사고를 유발한 경우
책임 한도가 설정되기도 합니다
너무 큰 배상 부담으로 기업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일부 분야에서는 최대 배상 한도를 정해놓기도 합니다.
무과실책임의 현대적 의의
개인주의에서 사회연대 정신으로
무과실책임은 "각자도생"에서 "함께 책임지는 사회"로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개인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더 안전하고 공정한 환경을 만들어가자는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약자 보호의 구체적 실현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이 현실에서는 항상 실현되지 않습니다. 개인과 대기업 사이에는 정보, 자본, 전문성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불균형을 법적으로 보정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미래 사회를 위한 예방적 기능
단순히 사고 난 후의 보상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가 나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기업들로 하여금 더욱 안전한 기술 개발과 관리 시스템 구축에 투자하도록 만듭니다.
마무리: 더 공정한 사회를 향한 진전
무과실책임은 단순한 법 이론이 아닙니다. "더 공정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우리 사회의 의지를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며, 위험을 만들어내는 활동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는 공평한 원칙의 구현입니다.
현대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새로운 기술들이 계속 등장하는 상황에서, 무과실책임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 우리는 모두가 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FAQ
Q. 무과실책임이면 가해자가 일부러 한 것도 아니고, 잘못도 없는데 왜 배상해야 하나요?
A. 무과실책임은 잘못 유무가 아니라 위험과 이익의 관계에 따라 책임을 묻습니다. 위험한 활동이나 제품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은, 설령 주의 의무를 다했더라도 그 활동에서 발생한 피해를 사회적으로 보상할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는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줄이고, 피해 구제를 우선하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Q. 무과실 책임이 적용되면 피해자가 손해액 전부를 다 받을 수 있나요?
A.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법에서 책임 한도를 두는 경우가 있고(ex.원자력손해배상법), 일부는 피해자 측 과실이 인정되면 배상액이 감액될 수 있습니다. 또, 천재지변이나 피해자의 고의 같은 면책 사유가 있으면 배상책임이 제한되거나 면제됩니다.
Q. 무과실책임과 관련된 사건은 모두 소송으로 가야 하나요?
A. 꼭 그렇진 않습니다. 많은 경우 법률상 무과실책임이 명시되어 있으면, 보험 청구나 행정적 보상 절차를 통해 소송 없이도 구제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조물책임법 적용 사건에서는 제조사나 판매사의 보험을 통해 합의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배상 범위나 책임 인정 여부에 다툼이 있는 경우에는 소송이 불가피할 수 있습니다.